탈시설화, 장애인의 주권적 영토의 회복!
황상현 (탈시설장애인당當 공동대변인)
나는 에이블리즘 사회에서 성장했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로 점철된 대학 입시제도를 거쳐 제도권 안에서 장애와 스포츠(신체활동)를 연구했다. 그 때는 내 삶 자체가 에이블리즘 논리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지금도 기억한다. 논문을 읽다가 운명처럼 푸코의 통치성 이론을 만났다. 장애인의 신체활동(또는 스포츠)이 국가의 통치 기술로 활용될 수 있다니! 점차 비판의식이 자라나고 있던 차에 지배 담론에 저항할 무기를 찾은 것 마냥 마음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타오르던 불꽃은 쉽게 사그라들었다. 구조에 저항할 만큼의 동력이 없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에이블리즘에 (재)순응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권력이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재활복지전문가들에 의해 재생산되는 장애 관련 지식이 실제로 장애인의 권리를 후퇴시킨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장애를 치료와 재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의료담론, 장애를 열등하다고 낙인 찍고 그 존재를 부정하는 우생학, 시혜자와 수혜자로 구분하는 자선과 동정의 시선은 이미 우리 사회 내 아주 깊숙한 곳까지 자리잡고 있었다. 에이블리즘은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장애학 관련 서적을 접하면서 에이블리즘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하나, 둘씩 수집하였다. 그러나 전선을 확대하지 못했다. 여전히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를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외부와 연대를 시도할 만한 용기도 없었다. 다가가기에는 너무 멀어 보였다. 그러던 찰나, 연구를 위해 김도현 선생님의 저서인 ‘차별에 저항하라’ 읽게 되었다.
책장을 넘길 때 마다 혼란이 커졌다. 내가 두발로 딛고 서 있었던 이 땅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장애와 관련한 어떤 사회변화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장애인운동의 역사는 수많은 열사들의 죽음 위에 우리가 서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껏 전문가 행세를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연구를 위해 직접 전장연을 찾아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에게는 단순한 인터뷰가 아니었다. 마치 저 먼 땅에 수립된 망명정부를 방문하여 해방 용사들을 만난 듯한 기쁨이었다. 이어 박경석 대표가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참사 23주기 투쟁’에 초대(?)해주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따라 나섰다. 그곳에서 협력적(collective)으로 타오르는 연대의 들불을 보았다.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진,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인 저항의 맞불.
그제서야 명확하게 알았다. 사회는 자연스럽게 진보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도 하늘에서 공짜로 떨어지지 않는다.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활동가들과 그것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세력이 주체적으로 사회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탈시설화도 마찬가지이다.
Chapman, Carey와 Ben-Moshe(2014)이 말하듯 시설화의 역사는 단순히 장애인의 돌봄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구금, 감금의 역사와 결을 같이 한다. 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포장하더라도 시설화의 본질은 지배세력이 광인, 빈민, 장애로부터 자신들만의 안전한 사회를 구축하려는 정치적 합리화에 불과하다. 또한 자본주의화된 장애인 시설에서 창출된 이윤의 대부분은 지배계급에게 귀속된다. 장애인 시설은 비장애인 사회의 안녕과 이익을 보존 또는 증진하기 위해 착취와 수탈이 이루어지는 식민화된 공간이다.
또한 시설화는 감금담론과 의료담론, 우생학과 긴밀히 연동하여 작동한다(Chapman, Carey & Ben-Moshe, 2014). 이를 통해 비장애인 중심 사회는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위치시키고 교정(재활 또는 교육)을 통해 정상 규준에 도달해야 하는 존재로 호명한다. 재활전문가에게 교정을 받은 후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지낼 수 있다면 그들은 정상 시민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장애인은 주류집단의 안전을 위해 총체적으로 배제 및 관리된다. 열등한 존재의 삶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효율성의 논리 아래 최종 승인된다. 결국 시설, 또는 시설화는 에이블리즘을 강화시키는 동시 에이블리즘을 존속시키는 강한 물질적, 이념적 토대의 역할을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탈시설화는 단순히 거주 공간을 지역사회로 이동하는 것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탈시설화는 첫째, 장애인의 삶의 터전이 착취와 수탈을 반복하는 식민화된 공간이 아닌 주권적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정의를 향한 투쟁이다. 둘째, 정치인들이 사회를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정치적 표상으로 장애인(시설)을 도구화하는 것에 대한 투쟁이다. 셋째, 장애 관련 사업을 통해 발생하는 유무형의 이익이 에이블리즘을 공고히 하는데 활용되는 것에 대한 투쟁이다.
물론 탈시설화에 성공했다고 유토피아가 도래하지 않는다. 에이블리즘은 또다시 장애인을 식민화하기 위해 진화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탈시설화를 위해 물리적인 조건의 변경과 함께 끊임없이 (재)시설화를 정당화하는 에이블리즘을 간파하고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비록 투쟁의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하지만 멀리 캐나다에서 탈시설당을 지지하는 글을 쓴다. 나처럼 에이블리즘에 저항하고자 하나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에이블리즘이 우리 사회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겁 많던 내가 (내 마음에 세워진 망명정부 같은) 전장연을 만나 용기를 낸 것처럼 탈시설당은 주저하고 있던 수많은 시민의 가슴에 저항의 불꽃을 심어 서로를 연결하는 장(場)이 되리라 희망한다.
나 역시 탈시설당 공동대변인으로서 한국뿐만 아니라 캐나다에서도 탈시설화를 향한 새로운 연대를 이루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또한 탈시설화은 궁극적으로 장애인과 우리 모두의 해방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모든 정치집단과 국민에게 탈시설당 지지를 간곡히 요청한다.
[장애인이 잃어버린 주권적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이번 총선에서 탈시설당을 적극 지지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s://cdn.imweb.me/upload/S20231228afff51e91ebef/f2d61b5c3e254.png) | ![](https://cdn.imweb.me/upload/S20231228afff51e91ebef/df188dafc70c7.png) | ![](https://cdn.imweb.me/upload/S20231228afff51e91ebef/b5631b6b9e1fa.png) |
황상현 1986년 2월 17일 일본 오사카 출생 한국체육대학교 - 특수체육학 박사 (2022) University of Alberta – Postdoctoral fellowship (2023-현재) JUST MOVEMENT CREATE SPACE – Space Holder (2023-현재) Special Olympic International MATP 국제자문위원 (2023- 현재) 2021 한국장애인재단 장애의 재해석 논문 경진대회 - 보건복지부 장관상 수상 (2021) |
탈시설화, 장애인의 주권적 영토의 회복!
황상현 (탈시설장애인당當 공동대변인)
나는 에이블리즘 사회에서 성장했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로 점철된 대학 입시제도를 거쳐 제도권 안에서 장애와 스포츠(신체활동)를 연구했다. 그 때는 내 삶 자체가 에이블리즘 논리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지금도 기억한다. 논문을 읽다가 운명처럼 푸코의 통치성 이론을 만났다. 장애인의 신체활동(또는 스포츠)이 국가의 통치 기술로 활용될 수 있다니! 점차 비판의식이 자라나고 있던 차에 지배 담론에 저항할 무기를 찾은 것 마냥 마음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타오르던 불꽃은 쉽게 사그라들었다. 구조에 저항할 만큼의 동력이 없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에이블리즘에 (재)순응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권력이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재활복지전문가들에 의해 재생산되는 장애 관련 지식이 실제로 장애인의 권리를 후퇴시킨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장애를 치료와 재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의료담론, 장애를 열등하다고 낙인 찍고 그 존재를 부정하는 우생학, 시혜자와 수혜자로 구분하는 자선과 동정의 시선은 이미 우리 사회 내 아주 깊숙한 곳까지 자리잡고 있었다. 에이블리즘은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장애학 관련 서적을 접하면서 에이블리즘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하나, 둘씩 수집하였다. 그러나 전선을 확대하지 못했다. 여전히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를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외부와 연대를 시도할 만한 용기도 없었다. 다가가기에는 너무 멀어 보였다. 그러던 찰나, 연구를 위해 김도현 선생님의 저서인 ‘차별에 저항하라’ 읽게 되었다.
책장을 넘길 때 마다 혼란이 커졌다. 내가 두발로 딛고 서 있었던 이 땅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장애와 관련한 어떤 사회변화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장애인운동의 역사는 수많은 열사들의 죽음 위에 우리가 서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껏 전문가 행세를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연구를 위해 직접 전장연을 찾아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에게는 단순한 인터뷰가 아니었다. 마치 저 먼 땅에 수립된 망명정부를 방문하여 해방 용사들을 만난 듯한 기쁨이었다. 이어 박경석 대표가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참사 23주기 투쟁’에 초대(?)해주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따라 나섰다. 그곳에서 협력적(collective)으로 타오르는 연대의 들불을 보았다.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진,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인 저항의 맞불.
그제서야 명확하게 알았다. 사회는 자연스럽게 진보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도 하늘에서 공짜로 떨어지지 않는다.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활동가들과 그것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세력이 주체적으로 사회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탈시설화도 마찬가지이다.
Chapman, Carey와 Ben-Moshe(2014)이 말하듯 시설화의 역사는 단순히 장애인의 돌봄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구금, 감금의 역사와 결을 같이 한다. 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포장하더라도 시설화의 본질은 지배세력이 광인, 빈민, 장애로부터 자신들만의 안전한 사회를 구축하려는 정치적 합리화에 불과하다. 또한 자본주의화된 장애인 시설에서 창출된 이윤의 대부분은 지배계급에게 귀속된다. 장애인 시설은 비장애인 사회의 안녕과 이익을 보존 또는 증진하기 위해 착취와 수탈이 이루어지는 식민화된 공간이다.
또한 시설화는 감금담론과 의료담론, 우생학과 긴밀히 연동하여 작동한다(Chapman, Carey & Ben-Moshe, 2014). 이를 통해 비장애인 중심 사회는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위치시키고 교정(재활 또는 교육)을 통해 정상 규준에 도달해야 하는 존재로 호명한다. 재활전문가에게 교정을 받은 후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지낼 수 있다면 그들은 정상 시민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장애인은 주류집단의 안전을 위해 총체적으로 배제 및 관리된다. 열등한 존재의 삶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효율성의 논리 아래 최종 승인된다. 결국 시설, 또는 시설화는 에이블리즘을 강화시키는 동시 에이블리즘을 존속시키는 강한 물질적, 이념적 토대의 역할을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탈시설화는 단순히 거주 공간을 지역사회로 이동하는 것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탈시설화는 첫째, 장애인의 삶의 터전이 착취와 수탈을 반복하는 식민화된 공간이 아닌 주권적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정의를 향한 투쟁이다. 둘째, 정치인들이 사회를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정치적 표상으로 장애인(시설)을 도구화하는 것에 대한 투쟁이다. 셋째, 장애 관련 사업을 통해 발생하는 유무형의 이익이 에이블리즘을 공고히 하는데 활용되는 것에 대한 투쟁이다.
물론 탈시설화에 성공했다고 유토피아가 도래하지 않는다. 에이블리즘은 또다시 장애인을 식민화하기 위해 진화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탈시설화를 위해 물리적인 조건의 변경과 함께 끊임없이 (재)시설화를 정당화하는 에이블리즘을 간파하고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비록 투쟁의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하지만 멀리 캐나다에서 탈시설당을 지지하는 글을 쓴다. 나처럼 에이블리즘에 저항하고자 하나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에이블리즘이 우리 사회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겁 많던 내가 (내 마음에 세워진 망명정부 같은) 전장연을 만나 용기를 낸 것처럼 탈시설당은 주저하고 있던 수많은 시민의 가슴에 저항의 불꽃을 심어 서로를 연결하는 장(場)이 되리라 희망한다.
나 역시 탈시설당 공동대변인으로서 한국뿐만 아니라 캐나다에서도 탈시설화를 향한 새로운 연대를 이루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또한 탈시설화은 궁극적으로 장애인과 우리 모두의 해방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모든 정치집단과 국민에게 탈시설당 지지를 간곡히 요청한다.
[장애인이 잃어버린 주권적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이번 총선에서 탈시설당을 적극 지지해주시기 바랍니다!]
황상현
1986년 2월 17일 일본 오사카 출생
한국체육대학교 - 특수체육학 박사 (2022)
University of Alberta – Postdoctoral fellowship (2023-현재)
JUST MOVEMENT CREATE SPACE – Space Holder (2023-현재)
Special Olympic International MATP 국제자문위원 (2023- 현재)
2021 한국장애인재단 장애의 재해석 논문 경진대회 - 보건복지부 장관상 수상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