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탈시설. 서울은 지웠고, 국회는 뭉갰다. 끝까지 쓴 건 탈시설장애인당當 뿐이었다.
오늘, 국회 본회의에서 장애인권리보장법이 통과됐다. 이번 법안에는 ‘탈시설화’가 포함됐다. 장애계의 오랜 숙원 사업이던 장애인권리보장법이 드디어 제정된 가운데 ‘탈시설’ 세글자 까지 포함되었으니 분명 반가운 입법이다. 그러나 이 통과를 마냥 환영만 할 수는 없다.
반가운 이유는 분명하다. 탈시설이 법안에 들어간 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가 탈시설에 충분히 공감해서 넣은 것이 아니다. 정부와 국회가 먼저 시설수용체계와 결별할 결심을 세워서 넣은 것도 아니다. 시설에서 살아남은 장애인들이, 시설 밖에서 함께 살 권리를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지하철 승강장에서, 거리와 농성장에서 끝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에, 그 시간을 더는 외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겨우 탈시설 세 글자일지 몰라도, 우리는 그 세 글자를 법에 새기기 위해 너무 오래 버티고, 너무 오래 싸워왔다.
우리의 투쟁은 국회 앞 농성장과 출근길 지하철에서만 시작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설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시설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 자체가 이미 투쟁이었다. 사랑과 보호의 이름으로 삶을 빼앗기지 않으려 버티는 시간, 통제와 감시 속에서도 끝내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포기하지 않는 시간, 그 시간 자체가 이미 탈시설 투쟁이었다. 어떤 동료들은 끝내 살아남지 못하고 시설에서 죽어갔다. 살아남은 시간도 투쟁이었고, 살아남지 못한 죽음도 이 체제를 고발하는 투쟁이었다. 국회의사당역 앞 농성장 1865일,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 1064일이라는 숫자조차 그 이전의 투쟁을 다 담지 못한다. 그 오래된 투쟁의 시간들을 끌고 여기까지 와서 겨우 밀어 넣은 단어가 ‘탈시설화’라면, 우리는 그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그 앞에서 박수칠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들어선 뒤 서울에서 탈시설 권리는 노골적으로 약탈되었다. 탈시설지원조례는 폐지됐고, 거주시설 연계사업도 폐지됐다. 장애인이 시설 밖으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던 정책은 지워졌고, 시설만 남았고, 시설만 더 커지고, 시설만 더 정교하게 관리되고 강화됐다. 서울은 탈시설을 권리로 보지 않았다. 서울은 탈시설을 삭제의 대상으로 다뤘으며, 탈시설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권리가 아니라, 아주 소수의 장애인만 여러 조건이 맞아야 겨우 허락받을 수 있는 예외이자 특권처럼 취급되었다.
그렇다면 국회는 달랐는가. 국회는 탈시설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그간 우리의 요구가 너무 길었고, 너무 질겼고,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회가 탈시설을 정면으로 쓴 것도 아니다. 삭제하지는 못했지만, 끝내 정면으로 쓰지도 못했다. 법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도 정부와 국회는 탈시설의 권리를 또렷하게 세우기보다, 시설의 반발을 관리하고 시설의 불안을 달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았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시설이 “폐쇄되거나 너무 악마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언급하며, 그런 방향으로 집행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책임과 권한을 가진 사람이 탈시설을 국가의 분명한 의무로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시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설명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바로 그래서 이번 입법은 진전이면서도 동시에 타협의 자국을 선명하게 남긴다. ‘탈시설화’가 들어간 것은 성과다. 그러나 탈시설이 권리로 못 박히지 못한 것은 국가의 비겁함이다. 바로 그 수십 년간 반복된 비겁함 때문에, 수십 년간 장애인들은 시설 안에서 학대당하고, 고립되고, 인권참사로 죽어갔음에도 국가는 끝내 시설수용체계와 결별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시설수용을 끝내야 한다는 데까지도,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권리를 국가의 분명한 의무로 세우는 데까지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몇 년 동안 탈시설을 탈시설이라고 끝까지 쓴 것은 누구였는가. 서울도 아니고, 국회도 아니었고, 정부도 아니었다. 서울은 지웠고, 국회는 뭉갰다. 탈시설을 지우지도 않고, 흐리지도 않고, 다른 말로 돌리지도 않고, 끝까지 탈시설을탈시설이라고 쓴 것은 탈시설장애인당當뿐이었다.
나는 시설이 무엇인지 안다. 시설은 사랑과 보호의 이름으로 삶을 빼앗는 곳이었다. 내가 어디서 살지, 누구와 살지,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하루를 보낼지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래서 탈시설은 시설수용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구색 맞추듯 덧붙이는 정책이 아니다. 손을 들어 “저 시설 나갈래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일부 장애인만을 위해 준비된 사업도 아니다. 탈시설은 모두를 위한 권리다. 장애인이 시설에 갇히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권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법안에 단어 하나가 들어간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탈시설은 더 또렷한 권리로 나아가야 한다.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는 구조를 끝내야 하고, 시설 밖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거·활동지원·소득·의사소통·동료지원과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가 국가 책임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야 탈시설은 단어가 아니라 삶이 된다.
탈시설은 서울에서 지워졌고, 국회에서 뭉개졌다. 그럼에도 끝내 법의 문장 안으로 밀어 넣은 것은 탈시설 장애인들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탈시설을 탈시설이라고 쓴 것은 탈시설장애인당當이었다. 우리는 탈시설을 법에 한 줄 넣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탈시설 그 자체를 현실에 새기기 위해 존재한다. 탈시설화를 넘어, 탈시설을 탈시설이라고 부르는 입법과 제도를 만들고, 누구도 시설에 남겨지지 않도록 모두가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 때까지, 우리는 탈시설을 끝까지 탈시설이라고 말할 것이다.우리는 탈시설을 끝까지 탈시설이라고 말할 것이다.
2026년 4월 23일
조상지
[성명] 탈시설. 서울은 지웠고, 국회는 뭉갰다. 끝까지 쓴 건 탈시설장애인당當 뿐이었다.
오늘, 국회 본회의에서 장애인권리보장법이 통과됐다. 이번 법안에는 ‘탈시설화’가 포함됐다. 장애계의 오랜 숙원 사업이던 장애인권리보장법이 드디어 제정된 가운데 ‘탈시설’ 세글자 까지 포함되었으니 분명 반가운 입법이다. 그러나 이 통과를 마냥 환영만 할 수는 없다.
반가운 이유는 분명하다. 탈시설이 법안에 들어간 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가 탈시설에 충분히 공감해서 넣은 것이 아니다. 정부와 국회가 먼저 시설수용체계와 결별할 결심을 세워서 넣은 것도 아니다. 시설에서 살아남은 장애인들이, 시설 밖에서 함께 살 권리를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지하철 승강장에서, 거리와 농성장에서 끝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에, 그 시간을 더는 외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겨우 탈시설 세 글자일지 몰라도, 우리는 그 세 글자를 법에 새기기 위해 너무 오래 버티고, 너무 오래 싸워왔다.
우리의 투쟁은 국회 앞 농성장과 출근길 지하철에서만 시작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설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시설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 자체가 이미 투쟁이었다. 사랑과 보호의 이름으로 삶을 빼앗기지 않으려 버티는 시간, 통제와 감시 속에서도 끝내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포기하지 않는 시간, 그 시간 자체가 이미 탈시설 투쟁이었다. 어떤 동료들은 끝내 살아남지 못하고 시설에서 죽어갔다. 살아남은 시간도 투쟁이었고, 살아남지 못한 죽음도 이 체제를 고발하는 투쟁이었다. 국회의사당역 앞 농성장 1865일,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 1064일이라는 숫자조차 그 이전의 투쟁을 다 담지 못한다. 그 오래된 투쟁의 시간들을 끌고 여기까지 와서 겨우 밀어 넣은 단어가 ‘탈시설화’라면, 우리는 그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그 앞에서 박수칠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들어선 뒤 서울에서 탈시설 권리는 노골적으로 약탈되었다. 탈시설지원조례는 폐지됐고, 거주시설 연계사업도 폐지됐다. 장애인이 시설 밖으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던 정책은 지워졌고, 시설만 남았고, 시설만 더 커지고, 시설만 더 정교하게 관리되고 강화됐다. 서울은 탈시설을 권리로 보지 않았다. 서울은 탈시설을 삭제의 대상으로 다뤘으며, 탈시설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권리가 아니라, 아주 소수의 장애인만 여러 조건이 맞아야 겨우 허락받을 수 있는 예외이자 특권처럼 취급되었다.
그렇다면 국회는 달랐는가. 국회는 탈시설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그간 우리의 요구가 너무 길었고, 너무 질겼고,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회가 탈시설을 정면으로 쓴 것도 아니다. 삭제하지는 못했지만, 끝내 정면으로 쓰지도 못했다. 법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도 정부와 국회는 탈시설의 권리를 또렷하게 세우기보다, 시설의 반발을 관리하고 시설의 불안을 달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았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시설이 “폐쇄되거나 너무 악마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언급하며, 그런 방향으로 집행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책임과 권한을 가진 사람이 탈시설을 국가의 분명한 의무로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시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설명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바로 그래서 이번 입법은 진전이면서도 동시에 타협의 자국을 선명하게 남긴다. ‘탈시설화’가 들어간 것은 성과다. 그러나 탈시설이 권리로 못 박히지 못한 것은 국가의 비겁함이다. 바로 그 수십 년간 반복된 비겁함 때문에, 수십 년간 장애인들은 시설 안에서 학대당하고, 고립되고, 인권참사로 죽어갔음에도 국가는 끝내 시설수용체계와 결별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시설수용을 끝내야 한다는 데까지도,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권리를 국가의 분명한 의무로 세우는 데까지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몇 년 동안 탈시설을 탈시설이라고 끝까지 쓴 것은 누구였는가. 서울도 아니고, 국회도 아니었고, 정부도 아니었다. 서울은 지웠고, 국회는 뭉갰다. 탈시설을 지우지도 않고, 흐리지도 않고, 다른 말로 돌리지도 않고, 끝까지 탈시설을탈시설이라고 쓴 것은 탈시설장애인당當뿐이었다.
나는 시설이 무엇인지 안다. 시설은 사랑과 보호의 이름으로 삶을 빼앗는 곳이었다. 내가 어디서 살지, 누구와 살지,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하루를 보낼지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래서 탈시설은 시설수용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구색 맞추듯 덧붙이는 정책이 아니다. 손을 들어 “저 시설 나갈래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일부 장애인만을 위해 준비된 사업도 아니다. 탈시설은 모두를 위한 권리다. 장애인이 시설에 갇히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권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법안에 단어 하나가 들어간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탈시설은 더 또렷한 권리로 나아가야 한다.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는 구조를 끝내야 하고, 시설 밖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거·활동지원·소득·의사소통·동료지원과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가 국가 책임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야 탈시설은 단어가 아니라 삶이 된다.
탈시설은 서울에서 지워졌고, 국회에서 뭉개졌다. 그럼에도 끝내 법의 문장 안으로 밀어 넣은 것은 탈시설 장애인들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탈시설을 탈시설이라고 쓴 것은 탈시설장애인당當이었다. 우리는 탈시설을 법에 한 줄 넣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탈시설 그 자체를 현실에 새기기 위해 존재한다. 탈시설화를 넘어, 탈시설을 탈시설이라고 부르는 입법과 제도를 만들고, 누구도 시설에 남겨지지 않도록 모두가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 때까지, 우리는 탈시설을 끝까지 탈시설이라고 말할 것이다.우리는 탈시설을 끝까지 탈시설이라고 말할 것이다.
2026년 4월 23일
조상지